ELKISS BLOG

시안에 넣은 문장들이 궁금했습니다

세 장의 종이를 들고 갸웃하는 아테나

블로그 레이아웃을 확인하려고 시안 문서를 한 장 만들었습니다. 글꼴이 제대로 그려지는지, 줄간격이 답답하지 않은지 눈으로 재려고 만든 자입니다.

거기에 이런 문장들을 넣었습니다.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

The quick brown fox jumps over the lazy dog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ng elit…

다 넣고 나서야 이상했습니다. 왜 하필 이 문장들일까요. 어디선가 봤으니 가져왔을 뿐, 무엇을 재는 물건인지 모르고 쓰고 있었습니다.

팬그램은 분류, 로렘 입숨은 이름이었습니다#

앞의 둘은 팬그램입니다. 그럼 로렘 입숨은 뭐라고 부를까요. 저는 한참 답을 못 찾았는데, 두 낱말이 애초에 같은 자리에 놓이는 것이 아니어서 그랬습니다.

팬그램은 분류입니다. “모든 글자가 적어도 한 번은 나오는 문장”이면 무엇이든 팬그램입니다. 그런 문장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실제로 여럿 있습니다.

로렘 입숨은 특정 텍스트의 이름입니다. Lorem ipsum dolor sit amet… 이라는 그 문자열 하나를 가리킵니다. 분류의 이름이 아니라 그 분류에 속한 것 하나의 이름입니다.

그럼 로렘 입숨은 어느 분류에 속할까요. 플레이스홀더 텍스트입니다. 더미 텍스트, 필러 텍스트라고도 합니다.

분류그 분류에 속하는 것
팬그램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 · The quick brown fox…
플레이스홀더 텍스트Lorem ipsum dolor sit amet…

그러니까 나란히 놓고 볼 것은 팬그램과 플레이스홀더 텍스트입니다. 로렘 입숨은 그 오른쪽 칸에 있는 여럿 중 하나일 뿐입니다.

방법은 반대인데 노리는 것은 같습니다#

이제 제대로 나란히 놓고 보니, 두 분류는 방법이 정반대였습니다.

팬그램플레이스홀더 텍스트
보는 것글자 하나하나의 모양글 덩어리의 짜임
방법쓰이는 글자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뜻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실패한 글자라도 빠지면뜻이 읽혀버리면

팬그램은 글꼴이 모든 글자를 제대로 그리는지 봅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확인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글자가 생깁니다.

플레이스홀더는 반대로 뜻을 가립니다. 뜻이 읽히면 내용에 눈이 가고, 그러면 폭이나 줄간격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한쪽은 글자를 최대한 드러내고, 한쪽은 뜻을 최대한 가립니다. 그런데 노리는 것은 같습니다. 둘 다 글을 읽지 말고 보라고 만든 물건입니다. 하나는 글자 모양을 보라고, 하나는 짜임을 보라고 그렇게 합니다.

반대로 생긴 둘이 같은 문서에 나란히 들어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Lorem 은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로렘 입숨의 출처는 확인이 됩니다. 키케로의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기원전 45년) 1.10.32–33 대목입니다. 햄든-시드니 대학의 라틴어 교수 Richard McClintock 이 consectetur 라는 흔치 않은 라틴어 단어를 실마리로 고전 문헌을 뒤져 찾아냈습니다.1

원문과 나란히 놓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입니다.

키케로
…qui dolorem ipsum quia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 velit,
sed quia non numquam eius modi tempora incidunt ut labore et
dolore magnam aliquam quaerat voluptatem.

로렘 입숨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ng elit,
sed do eiusmod tempor incididunt ut labore et dolore magna aliqua.

dolorem ipsum 에서 앞 두 글자가 떨어져 나가 Lorem ipsum 이 됐습니다. Lorem 은 라틴어 단어가 아닙니다. dolorem(고통)의 잘린 조각입니다. 원문은 “고통 그 자체를 사랑하거나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로 시작하는 문장입니다.

원본은 설명을 고쳤는데 복사본은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상 못 한 것이 나왔습니다.

로렘 입숨을 소개하는 글은 거의 항상 이렇게 시작합니다 — “1500년대부터 업계 표준이었다. 어느 인쇄공이 활자를 뒤섞어 견본책을 만들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가설입니다. McClintock 본인이 그렇게 “추정했다” 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2

더 이상한 것은, 저 설명이 실려 있던 lipsum.com 이 지금은 다르게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1966년, Letraset 의 디자이너들과 세인트브라이드 인쇄도서관 사서 James Mosley 가 1914년판 키케로 번역본을 가져다 뒤섞어 만들었다는 설명입니다. 애초에 그 전사 시트에 실으려고 만든 텍스트입니다 — 글자가 인쇄된 필름을 종이에 대고 문지르면 글자가 옮겨 붙는 물건으로, 디자이너들이 손으로 본문 문단을 흉내 낼 때 썼습니다. 그 시트로 업계에 퍼졌고, 나중에 Aldus PageMaker 같은 출판 소프트웨어에 실리면서 굳었습니다.3

새로 덧붙인 종이와 손에 든 낡은 사본을 견주는 아테나

원본은 설명을 고쳤는데 웹에 퍼진 복사본들은 여전히 옛 설명을 들고 다닙니다. 플레이스홀더 텍스트가 자기 유래를 잘못 말한 채로, 복사되면서 함께 퍼진 것입니다.

한글은 팬그램의 기준이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로렘 입숨은 라틴 문자로 적혀 있어서 한글 조판을 재지 못합니다. 글자 폭도 줄바꿈 규칙도 다릅니다. 그럼 팬그램은 어떨까요. 여기서 더 큰 문제를 만났습니다.

라틴 알파벳은 26자로 목록이 딱 떨어집니다. 한글은 무엇을 다 써야 팬그램일까요. 기본 자모 24개일까요, 쌍자음과 겹모음까지일까요, 겹받침까지일까요. 음절로 세면 11,172자입니다.

궁금해서 직접 세어봤습니다. 한글 음절은 유니코드에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어서 코드값 하나로 자모를 분해할 수 있습니다.4

초성 = (코드 - 0xAC00) / 588
중성 = (코드 - 0xAC00) % 588 / 28
종성 = (코드 - 0xAC00) % 28

기본 자음 14개와 기본 모음 10개를 기준으로 셌습니다.

문장자음 14모음 10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14 / 143 / 10
키스의 고유 조건은 입술끼리 만나야 하고 특별한 기술은 필요치 않다14 / 1410 / 10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 에 중성으로 나오는 모음은 ㅏ ㅓ ㅔ ㅗ ㅟ 다섯뿐입니다. 기본 모음은 그중 셋이고, 빠진 일곱 가운데 ㅜ 와 ㅣ 는 ㅟ 안에 섞여 나오기라도 합니다. ㅡ 와 ㅑ ㅕ ㅛ ㅠ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특히 짧은 획이 둘 붙는 모음은 이 문장에 하나도 없습니다. 글꼴을 보겠다고 만든 자가 모음의 절반 이상을 안 보고 넘어갑니다.

이 문장은 자음 팬그램입니다. 가장 유명한 한글 팬그램이고, Windows 의 글꼴 미리보기에도 쓰여서 저도 거기서 봤습니다.5

그리고 이건 그 문장의 잘못이 아닙니다. 한글은 같은 자모라도 초성이냐 종성이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고, 쌍자음과 겹모음까지 넣으면 문장이 문장이 아니게 됩니다. 모든 자모를 담는 짧은 한글 문장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한글에서는 “주요 자음·모음을 덮는가” 정도로 느슨하게 판단합니다.

뜻을 가리면 조판을 못 잽니다#

한글 더미 텍스트를 만들어주는 생성기도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뜻이 있는 진짜 한국어를 쓰는 방식이 대부분입니다.6

방식무엇을 쓰나뜻이
현대국어자주 쓰는 낱말읽힌다
신문신문에 나오는 표현읽힌다
문학·법조문민태원의 수필, 윤동주의 시, 헌법 조항읽힌다
무작위 자모자음과 모음을 뜻 없이 조합안 읽힌다

넷 중 뜻이 안 읽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로렘 입숨은 라틴 문자로 적힌 라틴어입니다. 문자는 재려는 것과 같고 말만 다릅니다. 그래서 글자 폭도 줄바꿈도 영어처럼 굴면서 뜻은 안 읽힙니다.

한글에는 그 자리에 놓을 것이 없습니다. 한글로 적히는 말은 사실상 한국어뿐이라, 뜻을 가리려면 문자를 흩어놓는 수밖에 없고 그러면 조판을 못 잽니다. 표의 셋은 조판을 재는 쪽이고, 남은 하나는 뜻을 가리는 쪽입니다.

읽히지 말라고 만든 글이 발행돼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려고 검색하다가 이상한 것을 봤습니다. 결과의 절반 가까이가 로렘 입숨을 지우지 않고 발행한 진짜 웹사이트였습니다.

한 곳을 열어봤습니다. 미국의 실제 사회복지 단체 사이트였습니다. 단체 이름도, 메뉴도, 주소와 전화번호도 전부 멀쩡했습니다. 그런데 페이지 제목이 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이고, 본문 전체가 플레이스홀더였습니다. 저 제목은 라틴어가 아닙니다. 로렘 입숨을 설명하는 영어 문장이고, 앞에서 본 lipsum.com 소개문에서 그대로 온 것입니다. 비슷한 제목을 단 대학 연구센터 페이지도 검색 결과에 함께 올라와 있었습니다. 어디인지는 적지 않겠습니다. 누구를 지적하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7

간판 글자가 전부 물결선인 가게 앞에서 놀란 아테나

읽히지 말라고 만든 글이 발행돼서, 이제 자기 자신을 검색하면 나옵니다.

에러가 난 것이 아닙니다. 빌드도 됐고 주소도 살아 있습니다. 잘못됐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자를 바꿨습니다#

시안 문서의 팬그램을 키스의 고유 조건은 입술끼리 만나야 하고 특별한 기술은 필요치 않다 로 바꿨습니다. 자음도 모음도 다 덮으니 자로서 제 일을 합니다. 바꾼 자는 시안 문서에 있습니다. 지금도 CSS 를 고칠 때마다 열어봅니다.

처음 의문은 “이 문장들이 뭐지”였는데, 답을 찾다 보니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이 셋 나왔습니다. 분류와 이름을 나란히 놓고 있었고, 낡은 유래 설명을 그대로 들고 있었고, 제 자가 재야 할 것을 재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셋 다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화면은 멀쩡했으니까요.

모르고 지나간 것은 조용히 있다가 나중에 돌아옵니다.


  1. Lorem Ipsum — All the facts, lipsum.com. 같은 내용이 The Story of Lorem Ipsum, Open Culture에도 정리돼 있습니다. 원전은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

  2. Open Culture는 “as McClintock theorized” 라고 적고 있습니다 —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그가 세운 가설이라는 뜻입니다. 확실한 것은 라틴어 대목이 키케로에서 왔다는 것뿐입니다. ↩︎

  3. lipsum.com의 현재 설명입니다. 1966년 Letraset 의 디자이너들과 James Mosley 가 1914년판 키케로 번역본을 뒤섞어 만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Mosley 는 런던 세인트브라이드 인쇄도서관(St Bride Printing Library)의 사서로 소개돼 있습니다. 전사 시트(dry transfer lettering)는 Letraset 이 1961년에 내놓은 제품으로, DTP 가 자리 잡기 전까지 디자이너가 글자를 손으로 앉히던 도구입니다. 옛 설명은 2015년 4월 스냅샷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두 판을 견주면 “ever since the 1500s” 가 “ever since 1966” 으로, “five centuries” 가 “many decades” 로 바뀌어 있습니다. ↩︎

  4. Hangul Syllables, Wikipedia. 음절 영역 U+AC00–U+D7A3 은 초성 19 × 중성 21 × 종성 28 = 11,172자로, 코드값에서 자모 번호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588은 21 × 28이고, 나눗셈은 몫만 씁니다. ↩︎

  5. 팬그램, 나무위키.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 를 한국어에서 가장 유명한 팬그램으로 소개하며 Windows Vista 이후의 글꼴 미리보기 창에도 쓰인다고 하고, 키스의 고유 조건은… 은 GNOME 글꼴 설정의 미리보기에 쓰인다고 합니다. 이 문서도 한글에서는 “모든 글꼴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주요 자음·모음으로 판단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

  6. 한글입숨 — Hanipsum은 자음·모음 무작위 조합 외에 “현대국어”, “신문” 테마를 함께 제공합니다. 로렘 입숨, 나무위키에 따르면 다른 생성기는 민태원의 수필과 윤동주의 시를 쓰다가 대한민국 헌법 조항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

  7. 특정 사이트를 링크하지 않습니다. 직접 확인하려면 lipsum.com 소개문의 첫 문장(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을 그대로 검색해보면 됩니다. 로렘 입숨 자체가 아니라 로렘 입숨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지우지 않고 발행된 페이지들이 그대로 나옵니다. ↩︎